소문으로 듣던 예수님이 마을에 오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와 함께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을 입구에 있는 넓은 들판에 나가곤 했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님은 너름한 차림의 갈릴리 촌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저는 예수가 전하는 말에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도 정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스러운면서 상냥했고, 그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루살렘의 랍비들과는 다르게 그는 거만하지도 않았고, 냄새나고 지저분한 거리 사람들과 포옹을 했고, 그를 찾아오는 많은 병자들을 모두 받아주셨고, 또 그들을 가족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점점 분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싶었습니다. 더 만나고, 그분의 이야기를 더 들을 수록 저는 정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와서 쉬기도하고, 가르치기도 할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다락방을 비워두었습니다. 예수는 그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 하곤 했습니다. 저는 뒤에 앉아 말을 뒤에서 들을 때마다 깊이 예수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할때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졌습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저의 모든 삶을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새벽, 예수님의 제자들의 시끄럽고 놀란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숨이 제자들은 예수가 성전 경찰들에게 잡히셨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급하게 덮고 자던 이불을 몸에 두르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저만큼 앞에서 성전 경찰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떨어져서 그들의 뒤를 가만히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끌고가던 한 사람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그만 두르고 있던 이불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처럼, 그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숨어있는 다락방으로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두려워서 다락방에 숨어있는 동안에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에 의해 십자가에 박혀 죽으셨습니다. 너무 슬펐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삼일 , 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말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분을 보았다고…. 그리고 저도 그분을 보았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다니!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더 믿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여러 날 동안 우리들과 함께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들려 올려 가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던 어느 갑자기 하늘에서 불과 바람 소리가 들렸고,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겁에 질려 숨어있던 제자들은 밖으로 나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제자들은 힘있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집과 땅을 팔아 서로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중에 구브로 섬에서 삼촌, 요셉도 자신의 밭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들은 삼촌을 권위자라는 뜻으로 바나바 불렀습니다. , 이름은 마가입니다.

 

바나바 삼촌은 많은 도시를 다니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어느 제게 오셔서, 스데반을 죽일 증인이 되었고, 믿는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던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제는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안디옥과 다른 여러 도시에서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의 놀라운 능력과 모험을 이야기 주었습니다.

 

저도 삼촌처럼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 삼촌과 바울 아저씨를 따라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처음 일은 너무나 신이 났습니다. 고향을 떠나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바나바 삼촌과 바울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도시를 여행하는 것도 힘들었고, 새로운 도시에서 만나는 위협들이 싫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 여행 도중에 밤빌라에서 삼촌과 바울을 떠나 혼자서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삼촌과 바울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고, 여러 교회들도 세웠습니다. 저는 소식을 들을 마다 기뻤지만 마음 구석에서는 미안함과 자신에 대한 미움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때 내가 떠나왔을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텐데후회스럽기도 했습니다. 바나바 삼촌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 속에는 다시 선교 여행을 하고 싶은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시작할 있을까요?

 

어쩌면 기회가 제게 다시 같습니다. 멀리 떠나 있던 바나바 삼촌과 바울이 예루살렘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것입니다.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총회가 끝나고 저는 바나바 삼촌에게 말했습니다. 삼촌과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삼촌은 흔쾌히 저를 다시 받아주었습니다. 아니,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 에게도 저를 데리고 가자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때문에 아주 싸움이 두분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바나바 삼촌이 그렇게 크게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갈라져서 서로 다른 도시로 여행하기로 정했습니다. 때문에 수년간 복음을 위해 함께 했던 바나바 삼촌과 바울이 헤어졌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번씩이나 바나바 삼촌을 힘들게 했으니까요. 저는 바나바 삼촌의 얼굴을 쳐다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버리고 혼자 편한 삶을 선택했던 저를 비난하지 않고 다시 받아 삼촌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차라리 내가 따라 나서지 않았더라면, 사람이 이렇게 헤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 속상하고,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삼촌은 말없이 저의 등을 두드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저와 삼촌의 선교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로 인해 오랫동안 함께 했던 사람, 바나바 삼촌과 바울이 다투고 헤어지는 아픔이 안디옥 교회에 남았습니다.

 

오늘은 마가의 고백처럼, 아픈 이야기입니다. 다툼과 갈라짐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든지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싸우고 헤어진 경험, 다투고 교회를 떠나온 경험누가 옳은지를 떠나 다툼과 갈라짐은 자체로 모두에게 상처이고, 아픔입니다.

 

교회 선교 역사에서 가장 영웅인 바나바와 사도 바울의 아픈 이야기를 누가는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자신의 영웅을 미화하려하지 않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책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능력입니다. 숨기지 않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 교회의 모습을 사실대로 보여주는 힘.

 

우리는 종종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없이 관대하지만, 내게 싫어하는 사람은 것도 없이 미워하곤 합니다. 그냥 사람이 싫습니다. 사람 이야기만 들어도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거짓말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실수를 들으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 사람의 좋은 점만을 생각하고, 아주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곤 합니다.

 

하지만 누가는 짧은 글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다툼과 갈라짐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누구의 잘못을 타지기 보다는 사실 자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도 누가 옳고 그름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바나바가 옳았는지, 바울이 옳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오늘은 누가 옳은지가 아니라, 바나바의 선택을 중심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바나바는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특히 바울과 안디옥에서 갈라진 이후 그는 성경에서 사라집니다. 이상 바나바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바울은 성공한 사람이요, 바나바는 역사에서 잊혀진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선교를 이야기 바울을 말하지, 바나바를 말하지 않습니다. 1, 2 선교 여행도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했지만, 사람들은 바울의 선교 여행이라 부르지 바나바의 선교 여행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바나바, 이름은 빛없이 성경에서 사라졌습니다.

 

선교 훈련을 받고 있는 예비 선교사들에게 바울과 바나바 누구처럼 살고 싶으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을 선택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사람 바나바.

 

오늘 말씀 이후로 사도행전에서 사라지는 바나바, 그의 삶을 묵상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바나바는 사도행전 4장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는 지금의 터키와 시리아에 속해 있는 지중해 섬인 구브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셉입니다. 사도들이 그를 권위자 또는 위로자라는 뜻을 가진 바나바라고 부릅니다.

 

바나바는 위로하는 사람이었고,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있는 가지 사건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행전 4장입니다. 그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 앞에 두니라.” 바나바는 자신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자신의 이름으로 나눠주지도 않았습니다. 사도들 앞에 두었습니다. 자신의 소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에 대한 명예 또한 포기했습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소유에 마음을 두고 살지 않았습니다. 소유와 자신에게 욕심이 없는 사람, 탐욕이 없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자신과 소유에 욕심이 없기에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릴 있는 사람입니다.

 

저도 욕심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유와 자신 그리고 아이들과 교회를 향한 욕심에서도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리가 주는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사도행전 9장입니다. 바나바의 다른 성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에 걸맞게 위로자로, 권위자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사람을 향한 그의 마음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제자들을 향한 위로이고 격려였습니다.

 

청년이 있습니다. 유대의 율법에 아주 열심인 청년, 너무나 율법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람의 목숨을 취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청년, 사울.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다멕석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까지 잡고자 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9 26절을 보면, 제자들은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의 희심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 스데반의 순교를 보았고, 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 섰던 사울을 받아드린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운 대상이었고,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모두가 사울을 의심하고 그를 만나기를 두려워할 바나바가 나섭니다. 9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머물게 됩니다.

 

위로와 격려는 사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청년 사울을 바나바는 믿었습니다. 그의 신뢰가 사울에게 위로가 되었고, 격려가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그와 함께 동역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사도행전 11장에 나옵니다.

 

세 번째는 사도행전 11장입니다. 누가는 바나바의 성품을 줄로 정리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안디옥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보냅니다. 바나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옵니다. 그러자 바나바는 다소에 머물고 있는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에 와서 그를 안디옥 사람들에게 소개합니다.

 

결과적으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일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바나바는 사람들 눈에는 실패했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자들의 편에 서서 믿어달라고그를 변호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을 변호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울의 변화를 믿어준 바나바로 인해 사울은 담대히 사도들과 함께 복음을 전할 있었습니다. 우리는 강자의 편에 서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야 도움을 받을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자, 약한 ,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이미지를 실추시기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을 믿는 다는 것은 실망에 대한 부담이 있기에 어렵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을 있는 안전한 사람을 곁에 두고 믿고 싶어합니다.

 

군포에서 야학과 공부방을 사역을 때였습니다. 제가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말썽꾸러기들이지만 중에 특히, 아이는 심했습니다. 공부방 주변에 왔으면 때가 많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보다 먼저 사역을 시작했던 친구는 다른 학생들을 위해, 학생들을 공부방에 오게 하기를 바랬습니다. 저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들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의견에 반대했고, 친구는 사역을 그만두었습니다. 정말로 좋은 친구이고, 저보다 아이들을 아꼈던 친구입니다. 물론 지금도 서로 연락을 하고 살지만, 당시는 함께 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염려가 맞았습니다. 아이는 변하지 않았고 마침내 공부방 사무실에 새벽에 들어와 컴퓨터와 카메라를 홈쳐갔습니다.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믿어준다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 덕택에 검사도 만나보고, 판사도 만나보았습니다.    

 

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변화는 없었고 저는 캐나다에 왔습니다. 99 제가 결혼하는 , 저는 아이가 교회 이층에서 저희 결혼식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친구는 멀리서 바라보다가 결혼식이 끝나자 마자 자리를 떠났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고마웠습니다. 결혼식에 와서가 아니라, 다시 믿음을 갖게 주어서 말입니다.

 

누군가를 믿어준다는 것은 성공에 대한 가능성 때문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믿을 사람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라면 우리의 믿음은 사람이 아니라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성을 보고 운동 선수를 스카우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가능성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것이고, 그가 가능성이 있어 보이든, 아니며 전혀 없어 보이든 상관없이 그를 신뢰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이라고왜일까요? 너무 많이 사람들에게 실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믿기보다 그냥 사랑해 주는 것이 낫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실망할 것을 알지만, 서로 믿어 주어야 합니다. 실망할 것을 알지만, 사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바나바의 성품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입니다. 바나바와 바울, 여러 도시를 함께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병자들이 일어났고, 점쟁이들이 그들의 책을 태우고 회심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핍박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선교여행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총회를 마친 안타깝게도 서로 헤어지게 됩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바나바는 마가를 선교 여행에 다시 데려가려 했지만, 바울은 번째 여행에서 그들을 떠났던 마가를 다시 데려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사용한 헬라어 파록쉬스모스 그냥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아주 격한 다툼 표현할 사용되는 단어라고 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때문이 아주 격하게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다시 한번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바나바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들을 힘든 상황에서 버려두고 떠났던 마가를 버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선교 여행의 낙오자요, 실패자였던 마가를 다시 한번 믿어줍니다. 자신 때문에 바울과 다툼을 보고 미안해 하는 마가를 말없이 안아줍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선교 여행을 다시 시작합니다. 마가에게 기회를 더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의 힘과 능력과 성공으로 하나님을 자랑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쓰러지고 깨어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나를 세우기 위해 다른 사람을 버리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워주기 위해 나의 손해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많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아니라, 작은 사람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 삶이라 강한 자의 친구가 되어 나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위협을 무릅쓰면서 약한 자의 친구가 되어주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듯,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삶입니다. 실수하고 넘어진 자를 세상은 욕할 그리스도인은 그들을 안아주고, 품어주고, 다시 기회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배반의 두려움이 있고, 실망의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때론 너무 어리석게 보이고, 속아 넘어가는 갔더라도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고,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삶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 주는 삶이고, 약해진 그들의 손과 무릎을 다시 세워주는 삶입니다. 곁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비난하고 꾸중하는 사람이 아니라,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 넣어 주는 사람이 되어 주십시오. 가까이, 가족에서부터, 교회 공동체, 그리고 나의 이웃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삼세계의 사람들에게힘이 되어주고, 희망이 되어 주는 우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바나바의 선택은 성공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선택은 가능성이 아니라 신뢰였습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선택은?